“제 죄를 용서해주셨습니다.”

영화 <밀양>의 한 장면에서, 살인자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런 행함 없이, 율법도 지키지 않았으면서, 피해자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은 감옥에서 하나님을 영접하였고 하나님께 이미 용서받았다고 선언합니다. 그 말은 피해자의 심장을 다시 찌르는 칼이 되며 기독교 가톨릭의 무율법주의 교리에 본질적인 의문을 던집니다. 오직 믿음만으로 모든 죄가 사하여지고 구원받을 수 있는가? 사도 바울의 무율법주의 교리로 인해 인간의 죄와 책임이 너무도 쉽게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도덕적 타락에 주어진 값싼 면죄부, 그리고 무참히 짓밟힌 율법입니다.
2절 그날에 –만군의 여호와님의 말씀- 내가 이 땅에서 우상들의 이름들을 끊어서 다시는 그 이름들이 기억되지 않을 것이며 거짓 예언자들과 부정한 영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다.
3절 그래도 어떤 사람이 다시 예언하면 그를 낳은 그의 부모가 그에게 말할 것이다. ‘네가 살지 못하리니 이는 네가 여호와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예언할 때 그를 낳은 그의 부모가 그를 찌를 것이다.
4절 그날에 예언자들이 예언할 때 각자 그의 계시를 부끄러워할 것이며, 속이려고 털옷을 입지 않으며
5절 말할 것이다. 나는 예언자가 아니고 나는 땅을 일구는 사람이니 이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사람이 나를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6절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할 것이다. ‘네 손 사이에 이 다친 곳들은 무엇이냐?’ 그가 말할 것이다. ‘내 사랑하는 자의 집에서 내가 맞은 상처입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 예언자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서 거짓 예언자들과 부정한 영들을 떠나게 만드시기 위해 사용한 도구입니다. 스가랴에서 경고된 털옷을 입지 않은 거짓 예언자는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 바나바, 티모테오, 티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 예언자가 이스라엘 땅을 떠나 퍼뜨린 교리들이 전세계 기독교 가톨릭으로 퍼져 수없이 많은 형제자매를 넘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거짓 예언자의 무율법주의 교리에 속는 일을 막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 지금부터 성경의 말씀들과 사도 바울의 말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보며 사도 바울이 거짓 예언자임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 교리의 문제점
1.율법 폐지 주장
사도 바울은 여러 편지에서 율법으로 인해 저주를 받는다고 강조하며(갈라디아서 3:10-13),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심지어 그는 에베소서 2:15에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라고 까지 말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율법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전락시키며 도덕적 타락과 죄에 대한 경계심을 흐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0절 ‘토라 책에 기록된 모든 것 안에서 지내면서 행하지 않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라고 기록된 대로 토라의 행위로 난 자들은 모두 저주 아래 있습니다.
13절 마쉬아흐께서 우리를 위한 저주가 되셔서 토라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이는 ‘나무에 매달린 자는 모두 저주받은 자다.’라고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 그러나 한때 멀리 떨어져 있던 여러분이 이제는 마쉬아흐 예슈아 안에서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14절 참으로 그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는 두 편을 가르는 담 곧 적대심을 자신의 육신 안에서 허시고 둘을 하나로 만드셨습니다.
15절 토라의 계명들과 규례들을 폐지하셨으니 이는 그 둘을 자기 안에서 새 사람을 창조하여 평화를 이루시고
사도 바울은 율법을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으로 보지 않고, 인간을 얽매는 저주의 체계로 규정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율법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단순한 규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생명의 길이기도 하였습니다(신명기 30:15-16). 또한 예레미야 31:33에 기록되었듯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마음에 새기려 하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율법을 이루러 오셨다고 선언하셨죠(마태복음 5:17). 결국 사도 바울의 교리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어긋나며, 사도 바울의 무율법주의 교리를 받아들인 결과 지금의 신앙은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다’라는 값싼 위안의 수단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무율법주의 세상을 열고 죄악이 넘치도록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5:17~19
내가 토라나 예언서를 폐하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왔다.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기 전에는 토라의 일 점이나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거나 그렇게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는 하늘 왕국에서 가장 작다고 불릴 것이고,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하늘 왕국에서 크다고 불릴 것이다.
예레미야 31:33
참으로 이것은 내가 그날들 후에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이니 –여호와님의 말씀- 내가 그들 가운데 내 토라를 주고 그들 마음에 내가 그것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예레미야 31:36
만일 이 규례들이 내 앞에서 떠나면 –여호와님의 말씀- 이스라엘 자손도 그 모든 날 동안 내 앞에서 나라가 되지 못할 것이다.
2. 행함과 율법 없이 믿음만으로 구원 강조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오늘날 세상에 수많은 죄악과 도덕적 타락이 있게 한 사도 바울의 교리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함 없이 오로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값싼 면죄부는 죄에 대한 경계심을 흐렸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형제자매가 타락하여 넘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바울은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다’라는 근거로 아브라함이 율법 이전 시대 사람이었음을 들어, 믿음이 곧 의로움의 근거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율법 이전의 믿음의 본보기”로 끌어와 자신의 무율법주의 교리를 정당화한 것이지요.
로마서 4:2-3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로워졌다면 자랑할 것이 있겠지만, 하나님께는 없습니다.
참으로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3:5-6
5절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영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능력들을 행하신 것이 여러분의 토라의 행위 때문입니까? 아니면 신실함을 들었기 때문입니까?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으니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과 달리 구약의 맥락은 단순히 믿음만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6:4-5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신 근거는 “아브라함이 내 소리를 들었고, 내 지시와 명령들과 규례들과 토라들을 지켰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믿음은 율법적 순종과 분리되지 않았으며, 믿음과 율법을 지키는 행함이 함께 맞물려 드러난 것이었습니다. 결국 바울이 강조한 ‘율법을 지키는 행함과 무관한 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율법주의 믿음을 축소하고 왜곡시킨 해석이었던 셈입니다.
창세기 26:5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내 소리를 들었고, 내 지시와 명령들과 규례들과 토라들을 지켰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의 가르침과의 대립
바울이 거짓 예언자인 증거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자칭 예수님의 사도인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게 자주 맹세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절대 맹세하지 말라고요. (마태복음 5:34)
마태복음 5장
34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절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절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바울의 맹세는 그의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언행을 보이는 것이죠.
갈라디아서 1:20
-보십시오, 여러분에게 쓰고 있는 이 말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23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증인으로 불러서 말합니다. 내가 코린토에 더 이상 가지 않은 것은 여러분을 아끼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높아지지 말라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4:11, 마태복음 23:12)
누가복음 14:11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고,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번에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정반대의 행보를 보입니다. 자신을 본받으라며 스스로 높아지는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마쉬아흐이신 예수님을 본받는다면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낮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함이 합당한데 자신을 본받으라며 오히려 스스로 높이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고린도전서 11:1
내가 마쉬아흐를 본받는 것처럼 나를 본받는 자가 되십시오.
나아가 사도 바울은 스스로 한없이 높아져 하늘의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께도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를 알리겠다고 발언합니다.
에베소서 3:10
이는 이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를 하늘의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 알리려 하심이니
4. 통치자 옹호 문제
더 큰 문제는 사도 바울은 스스로 높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은 무율법주의자 통치자를 옹호하기까지 합니다. ‘권세에 적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시를 거역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권력에 대한 복종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로마서 13:2)
로마서 13장
1절 모든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 복종하십시오.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는 권세는 없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것입니다.
2절 그러므로 권세에 적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시를 거역하는 것이니 거역하는 자들은 스스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4절 참으로 그는 여러분을 선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사역자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악을 행하면 두려워하십시오. 이는 그가 공연히 칼을 차고 다니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로 복수하는 자입니다.
6절 이 때문에 여러분은 세금을 내는 것이니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로서 이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참된 선지자분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율법을 지키지 않는 통치자를 향해 책망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샤울 왕에게 “듣는 것이 희생제물보다 낫고 경청하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른 샤울 왕에게 버림받았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무엘상 15:22-23) 나탄 선지자는 다윗 왕이 밧세바로 인해 죄를 저질렀을 때, 그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정면으로 책망했습니다. (사무엘하 12장) 또한 엘리야는 아합 왕과 이세벨의 불의를 책망했습니다. (열왕기상 21장)
다른 선지자분들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선지자분들의 전통은 언제나 권력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율법을 지키지 않는 행동에 대해 책망하는 것이었지, 불의한 무율법주의 통치자를 신격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통치자를 신격화하는 사도 바울의 교리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불의한 무율법주의 인간을 하나님보다 높이고 사람 법 계명에 불과한 헌법을 하나님의 율법보다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5. 예수님의 열한 제자분들과 사도 바울의 차이
고린도전서 1:1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마쉬아흐 예슈아의 사도로 부름받은 파울과 형제 소스테네가
디모데전서 1:1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마쉬아흐 예슈아의 명령에 따라 마쉬아흐 예슈아의 사도가 된 파울이
디도서 1:3
자신의 정하신 때에 그의 말씀을 선포로 드러내시니 이 선포는 구원자이신 우리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내게 맡겨졌다.
예수님의 열한 제자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렇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말씀해주신 게 이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열한 제자분들은 절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그의 동역자 즉, 바나바, 티모테오, 티토 등은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뜻에 따라”라는 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빌려 자신의 말에 무게를 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23장에서의 거짓 예언자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신 경고의 말씀 “나는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명령하지도 않았으니”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거짓 예언자 사도 바울과 그 동역자들에 대해 미리 내다보시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의 무율법주의 교리와 그의 권위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거짓 예언자가 자기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빌려온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23장
19절 보라, 여호와의 회오리바람이 노여움으로 나오니 회오리치는 폭풍이다. 악인들의 머리 위에 회오리칠 것이다.
20절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마음의 계획들을 그가 행하고 이룰 때 그 마지막 날들에 너희가 정녕 그것을 깨달을 것이다.
21절 내가 그 예언자들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달려갔으며 내가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예언했다.
29절 내 말이 이렇게 불 같지 아니하냐? -여호와님의 말씀- 바위를 부수는 해머 같지 아니하냐?
30절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 예언자들을 치리니 –여호와님의 말씀- 내 말들을 서로 도둑질하는 자들을 칠 것이다.
31절 보라, 내가 그 예언자들을 치리니 –여호와님의 말씀- 그들의 혀를 놀려 말하는 자들을 칠 것이다.
32절 보라, 내가 거짓 꿈들을 예언하는 자들을 칠 것이다. -여호와님의 말씀- 그들이 그들의 거짓들과 방종들을 내 백성에게 전하여 치우치게 했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명령하지도 않았으니 그들은 전혀 이 백성에게 유익이 없다. -여호와님의 말씀-
33절 이 백성이나 예언자나 제사장이 네게 ‘여호와의 선언이 무엇이냐?’라고 묻거든 너는 그들에게 ‘너희가 짐이니 내가 너희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하여라. -여호와님의 말씀-
34절 ‘여호와의 선언’이라고 말하는 예언자나 제사장이나 백성은 내가 그 사람과 그의 집을 벌할 것이다.
36절 ‘여호와의 선언’을 너희는 더 이상 언급하지 마라. 이는 그 선언이 각 사람 자신의 말이니 너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들을 거꾸로 말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약 때부터 보내신 선지자분들은 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셨습니다. 사도 바울, 바나바, 티모테오, 티토처럼 개인 편지로 말씀을 기록하신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과 그 동역자들, 즉 바나바, 티모테오, 티토의 편지가 하나님의 명령과 뜻으로 둔갑한 것 자체가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6. 유대인 신화와 계보를 부정한 사도 바울
디모데전서 1:4
신화나 끝없는 족보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 것들은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보다는 도리어 쓸데없는 억측을 하게 한다.
디모데전서 4:7
저속하고 노망한 신화들을 거부하고, 경건해지도록 자신을 훈련하여라
디도서 1:14
예후다인들의 신화나, 진리에서 돌아선 사람들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여라.
디도서 3:9
그러나 어리석은 논쟁과 족보와 분쟁과 토라에 관한 싸움은 피하여라. 참으로 그런 것들은 유익하지 않고 헛되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서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고 거듭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족보는 단순한 혈통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고 성취됨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한 약속, 다윗의 왕위를 이을 자, 그리고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계보가 기록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를 무익하다고 한 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의 뿌리를 스스로 부정한 것이며, 이는 참된 선지자들의 전통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선지자분들과 예수님은 계보와 언약의 흐름 속에서 말씀을 선포하셨지만, 바울은 이를 ‘헛된 것’이라 치부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스스로 뿌리를 부정하며, 하나님의 언약과 예언을 무시하는 거짓 예언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론
오늘날 현실을 보면, 사도 바울의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는 값싼 구원이 얼마나 위험한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율법을 지킬 필요 없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무율법주의 교리 때문에 사람들은 죄에 대한 경계심이 흐려졌고, 도덕적 타락에 무감각해졌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목회자들이나 성폭력 가해자들이 “하나님께 회개했으니 끝났다”라고 주장하며 다시 강단에 서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스스로 칭하는 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 기독교 가톨릭의 어떤 자들은 사도 바울의 통치자 옹호 교리를 사용하여 정치 권력과 손잡고 마치 하나님이 그들의 편인 것처럼 선포합니다. 통치자가 율법을 지키느냐 그렇지 아니하냐는 그들에게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팔고, 사람들을 속여 자신들의 부귀영달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세상은 무율법주의로 나아갔고 오늘날 죄악과 타락이 만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레미야 23:16–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에게 예언하는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마라. 그들은 너희를 헛되게 하는 말로 속이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계시는 자신들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것이다.’라고 계속 말하며, 자기 고집 센 마음에 따라 걸어가는 모든 자에게 ‘너희에게 악이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거짓 예언자 사도 바울의 교리는 성경의 율법과 예수님의 가르침과 어긋납니다.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포하면서 율법의 정신을 폐지했고, 그 결과 오늘날 교회는 죄악을 무분별하게 덮어주고 권력을 정당화하며 타락해 왔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사라진 자리에 사람의 법이 높아졌습니다. 이 모든 왜곡의 뿌리인 무율법주의 사도 바울 교리를 직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8:6–7
그러나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런 작은 자 중 한 명을 넘어지게 하는 자는 차라리 그의 목에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 깊은 곳에 잠기는 것이 나을 것이다.
넘어지게 하는 일 때문에 세상에 화가 있다. 넘어지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넘어지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믿음으로 쉽게 죄 사함을 받고 구원에 이른다고 주장하여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거짓 예언자 사도 바울, 바나바, 티모테오, 티토의 교리에서 벗어나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의 값싼 면죄부인 무율법주의 교리에 머무는 한, 기독교 가톨릭의 타락은 멈추지 않고 심판에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말씀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 율법주의로 나아가야 합니다.